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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서사 문학

설화와 고전 소설 서사의 익명성과 신빙성

by munjang 2022. 11. 7.

1. 설화의 익명성

 

설화, 옛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서사의 세계는 한마디로 불특정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인물뿐 아니라 배경, 즉 시공간마저 익명성을 지닌다. 때와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특정되지 않은 설화의 시공간은 민중적 보편성을 지닌다. 그럴법한 그런 사람, 민중의 한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이 사람은 장소나 시대가 아니라 성품이나 사건으로 규정된다.

 

상당수 설화에서 개성화된 주인공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서사 화자의 서사적 불안정성 때문이다. 서사는 정보를 지닌 서사 화자가 이 정보를 지니지 않았거나 그렇다고 가정된 수용자에게 정보를 전해 주는 방식을 기본적인 제시 방식으로 한다. 특히 문학으로서 허구 서사는 이런 지배적 위치의 서사 화자가 지닌 편집자적 권한 위에 구성되고 전달된다. 그런데 이 설화에서 사건이 진행되면서 배경과 인물이 차차 특정화되는 것과는 반대로 작가나 서사 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작중의 시공간은 사슴이 말을 하고 선녀가 목욕하러 산속 연못에 내려왔던 시절과 장소로 구성되어 간다. 나무꾼이라는 인물도 ‘착한, 효자’라는 정보 외에 선녀의 날개옷을 감춘, 그래서 그녀와 결혼한 인물이 된다. 이렇게 사건이 배경은 물론 인물을 규정하지만, 이것은 특정화이지, 실명화는 아니다. 익명화의 반대로서 실명화는 단순히 이름의 노출이 아니라 이름과 실제 인물의 동시 노출이며 따라서 이름과 인물의 일치에 의한 개인의 종합적 특성의 확립, 즉 정체성 확립과 이를 통한 개성화 등을 포함한다. 여기서 개성화는 타인과 다른 자신의 발견뿐 아니라 자기 본질의 발견이라는 융의 개념을 포괄한다.

 

청자는 그가 ‘효자’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그가 착하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인식하고, 그가 사슴을 숨겨줄 만한 인물임을 납득하게 된다. 또 ‘나무를 한다’는 그의 일은 그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지위를 효율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설화라고 하는 구술 장르의 서사적 문법은 구술이라고 하는 제시의 형식과 기층에 속한 구연자들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구성된다. 구술을 통해 전파되는 설화는 가급적 단순한 정보와 형식을 지녀야 한다.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감추어진다기보다는 처음부터 호출되지 않는다. 설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은 사건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설화는 사건 중심적 서술을 그 특징으로 한다. 사건이 배경은 물론 인물을 규정하는 것이다.

 

2. 고전 서사 소설의 신빙성

 

원작자가 누구든 검녀에 소응천이라는 실명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은 허탄한 이야기에 신빙성을 부여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허탄한 이야기를 읽는데 돈과 시간을 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판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 상품으로써의 고전 소설이 등장한다. 문제는 이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든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허구라는 것을 전제하고 상품으로 출간된 작품들은 신빙성과 개연성을 만들어 내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것은 작가가 문자를 사용하여 창작한다는 소설 창작 환경의 서사적 안정성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문자를 사용하여 저술하기 때문에 작가는 독자나 조웅전에서 조정인은 회상과 꿈으로만 등장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주인공 조웅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사명감의 상징이며 운명이다. 다시 말해 조웅이라는 인물의 정체성의 본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조정인이 아니라 조웅이라는 인물의 실명성이라 할만한 포석에 해당한다. 이 장면으로 인해 조웅이라는 인물이 행하는 일들이 조정인의 아들 조웅이어서 할 만한 일이 된다. 이와 같이 소설적 개연성을 만들어내는 일이 곧 인물에 개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

 

인물에 실재성과 개연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인물을 그를 둘러싼 다른 인물과 시공간에 결합할 때, 그 배경의 실재성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 후기라는 특정 시기와 당대의 실제 인물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질적으로 강화한 박씨전이나 아예 주인공을 역사적 인물로 한 임장군전의 등장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소설에서 신빙성이란 허구인 줄 알면서도 믿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시공간은 마치 실재하는 곳처럼 정교하게 묘사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실재 존재했던 시공간을 묘사하듯 서술된다. 공간을 그대로 두고 시간을 거슬러 난을 당해 조정인이 황제를 모시고 경화문, 무봉태, 광임 교를 거쳐 피난길에 오르는 모습을 통해 실재와 같은 배경을 만들어 낸다 언어로 표현된 배경은 그림이나 사진과 달라서 형상의 시각적 구체성이 아니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즉 배경을 서술하는 개성적 표현에서 독자는 작가, 혹은 서사 화자의 문체가 지닌 개성을 감각하는 것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더 근접한 임장군전보다 상상이 개입된 박씨전이 더 역동적인 서사를 성취한 점에서 보듯이 소설적 신빙성은 개연성과 허구성 사이에 팽팽한 긴장을 요구한다. 물론 이 같은 지적은 문학적 성취 전반에 대한 것은 아니다. 시각에 따라 박씨전의 허구적 대리 만족보다 임장군전의 비극적 반성이 지닌 문학적 의미를 더 소중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박씨전이 개성적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역사적 성찰과 서사적 흥미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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